|
공급망은 이제 ‘운영 자격’을 따집니다
지난주에는 공급망에서 비용보다 ‘실제로 쓸 수 있는 길’의 가치가 커지는 흐름을 살펴봤습니다. 이번 주에는 그 다음 문제가 보입니다. 길이 열려 있다고 해서 화물이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배가 있어야 하고, 선사가 받아줘야 하며, 보험과 결제가 가능해야 합니다. 제재나 통관 규정에도 걸리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지도에는 있는 길이 실제 거래에서는 사라집니다.
호르무즈의 통항은 여전히 크게 위축돼 있고, 흑해에서도 항만과 선박을 둘러싼 위험이 이어집니다. 한쪽에서는 기존 항로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북극항로 같은 새로운 길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제재와 보험, 관세가 겹치면서 운송 가능 여부를 판단하는 조건 자체가 많아졌습니다. 미국 재무부가 최근 호르무즈와 관련해 다시 경고한 대상도 정상적인 통항 전체가 아닙니다. 이란 측이 요구하는 통행료나 특정 보험·서비스, 민감한 선박정보 제공, 지정된 주체와 연결된 거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제재 위험이 핵심입니다.
이 차이는 꽤 큽니다. 지금 공급망에서 부족해지는 것은 배나 항만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기업이 실제 거래에 사용할 수 있는 선박, 항로, 공급업체의 범위가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지난주가 ‘쓸 수 있는 길’의 문제였다면 이번 주에는 그 길을 쓸 수 있는 조건까지 들어왔습니다.
항로가 열려 있어도 거래가 안 될 수 있습니다
호르무즈에서 나타나는 상황을 보면 공급망의 물리적 상태와 상업적 상태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선박이 해협을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운송계약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특정 통행 조건이나 거래 상대방이 제재와 연결되는지 따져야 하고, 보험과 금융기관도 거래 위험을 따로 판단합니다. OFAC가 최근 다시 안내한 내용 역시 이란 측의 특정 통행 요구에 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제재 위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정상 통항 자체를 제재 대상으로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화주 입장에서는 이 구분이 더 현실적입니다. 선복이 시장에 존재해도 거래할 수 없는 선박이면 공급능력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보험이 붙지 않거나 결제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도 마찬가지입니다. 흑해처럼 군사적 위험과 항만 운영 문제가 겹치는 지역에서는 이런 조건이 더 자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에 배가 몇 척 있는지만 보고 실제 운송 여력을 판단하기 어려워지는 이유입니다.
이번 주 흐름에서는 ‘선복 부족’이라는 익숙한 말도 조금 달리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전체 선박 숫자가 부족한 것과 특정 화주가 안심하고 계약할 수 있는 선박이 부족한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후자가 운임과 운송계획에 영향을 주는 상황이라면 기업은 단순히 배를 찾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선박의 거래 이력과 보험, 결제 조건까지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새 항로의 가치는 위기 때 드러납니다
기존 항로가 흔들리는 사이 새로운 경로를 확보하려는 움직임도 이어집니다. 한국의 첫 북극항로 컨테이너 시범운항은 8월 22일 부산에서 출항했습니다. 해양수산부가 밝힌 목적도 당장 기존 아시아·유럽 항로를 대체하는 데 있기보다 실제 운항 경험과 물류 데이터를 확보하고 상업적 활용 가능성을 점검하는 데 가깝습니다.
이런 항로를 기존 노선과 단순히 운임으로 비교하면 판단이 어긋날 수 있습니다. 북극항로에는 계절성과 기상, 선박 사양, 보험, 운항 경험, 항만 연결 같은 조건이 붙습니다. 평상시에는 기존 항로보다 불편하거나 비쌀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길을 쓰기 어려워지는 순간에는 평가가 달라집니다. 평소 이용하지 않더라도 실제 운항 경험과 계약 체계를 갖고 있다면 하나의 선택지가 됩니다.
기업의 대체항로도 비슷합니다. 지도에 다른 항구가 있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항구까지 트럭이나 철도가 연결돼 있는지, 해당 항로를 운항하는 선사가 있는지, 필요한 시점에 선복을 잡을 수 있는지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대안을 몇 개 확보했느냐보다 문제가 생겼을 때 실제로 갈아탈 수 있는지가 더 정확한 질문입니다. 비용만 놓고 보면 비효율적인 선택지가 공급망 전체에서는 보험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관세가 공장과 재고 위치를 다시 묻습니다
북미에서는 관세가 다시 공급망 배치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캐나다 관세 조치가 이미 적용된 가운데 캐나다는 8월 25일 일부 미국산 제품에 대응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실제 적용은 9월 8일부터입니다. 철강과 농업장비, 전자제품 등 여러 품목군이 포함됩니다. 8월 27일 현재 양쪽 관세가 모두 시행 중인 것은 아닙니다. 미국 조치가 먼저 적용됐고 캐나다 측 대응은 시행을 앞둔 상태입니다.
기업에 더 까다로운 부분은 관세가 완제품 가격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북미 자동차와 배터리처럼 부품과 소재가 국경을 여러 차례 오가는 산업은 어느 단계에서 관세가 붙는지에 따라 생산구조 전체의 경제성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같은 제품을 만들어도 어느 공장을 쓰는지, 어떤 원산지의 부품을 넣는지, 재고를 어느 쪽 국경에 두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겉으로는 국가 간 관세 갈등으로 보이지만 기업 내부에서는 생산 동선을 다시 계산하는 문제에 가깝습니다. 원가가 가장 낮은 공장을 고르는 것만으로 답이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완제품이 나오기까지 몇 번 국경을 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원산지 규정과 관세를 만나는지까지 비용에 들어갑니다. 공급망이 길어서 문제가 아니라 같은 국경을 반복해서 넘도록 설계된 구조가 불리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AI는 창고보다 판단 과정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물류 기술에서도 변화가 보입니다. 이번 주에는 AI 기반 운송관리시스템과 운임 산정, 화물 중개 자동화 같은 영역으로 투자가 이어졌습니다. 글로벌 물류 소프트웨어 기업이 AI 기반 TMS 사업자를 인수한 사례를 보면 견적부터 운송사 선정, 운송 실행, 정산까지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처리하려는 방향이 확인됩니다. 별도로 통관 서류를 AI가 읽어 실제 업무 데이터로 전환하는 기능도 상용화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을 창고에서 사람을 줄이는 자동화와 같은 선상에 놓기는 어렵습니다. 물류기업이 다뤄야 하는 경우의 수 자체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운임이 바뀌고 항로가 흔들리며 관세와 통관조건도 수시로 달라집니다. 여러 운송사 가운데 누구에게 물량을 줄지, 어느 센터의 재고를 먼저 쓸지 결정하는 시간도 짧아졌습니다. AI가 들어가는 자리가 육체노동보다 이런 판단 과정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아직 AI가 공급망을 알아서 운영하는 단계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현재 활용은 사람이 검토해야 할 선택지를 줄이고 반복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는 쪽이 더 현실적입니다. 운송계획을 다시 짜는 데 하루가 걸리던 기업과 몇 시간 안에 바꿀 수 있는 기업은 같은 충격을 받아도 대응 속도가 달라집니다. 물류 자동화의 성과를 인력 감소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워지는 이유입니다.
공급망 분산은 공장 숫자로 끝나지 않습니다
제조업에서는 핵심광물과 반도체, 배터리, 방산을 중심으로 공급망을 다시 짜는 움직임이 이어집니다. 한국과 베트남도 핵심광물 공급망 협력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공개된 정부 자료를 보면 양국은 베트남에 핵심광물 공급망 센터를 구축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선광·제련 장비와 기술, 인력양성을 연결하는 구상입니다. 아직 완성된 공급망이 운영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센터 구축과 관련 협력을 추진하는 단계로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차이가 제조업 공급망에서 자주 놓치는 부분입니다. 광산을 확보했다고 배터리 공급망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광물을 분리하고 정제할 기술이 있어야 하고, 일정한 품질로 가공할 설비와 사람이 필요합니다. 반도체도 소재 공급처 하나를 다른 나라로 바꿨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장비와 인증, 전력, 용수, 물류가 이어져야 실제 생산이 가능합니다.
공장을 여러 나라에 두는 것도 같은 문제입니다. 해외 생산거점이 있어도 핵심 원료와 장비, 기술인력이 다시 하나의 국가에 묶여 있다면 위험은 그대로 남을 수 있습니다. 기업이 공급망을 분산했다고 판단할 때 공장이나 거래처 숫자만 보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 거점이 멈췄을 때 다른 곳에서 실제 생산량을 올릴 수 있는지, 그 제품을 기존 시장에 그대로 판매할 수 있는지까지 확인해야 합니다.
한국 기업은 ‘전환 시간’을 봐야 합니다
국내에서도 서로 다른 변화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북극항로 실증이 시작됐고, 항만과 터미널 투자가 이어집니다. 전자선하증권과 자동화, 반품물류 같은 운영 변화도 보입니다. 유통에서는 역직구와 즉시배송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해상운임과 안전운임 같은 비용 문제가 커지고, 다른 쪽에서는 새로운 물류망과 기술에 대한 투자가 진행되는 모습입니다.
이 흐름을 한데 놓으면 기업이 점검해야 할 대상도 조금 달라집니다. 대체 공급업체 명단이 있다고 바로 물량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항구가 있어도 내륙운송을 붙이지 못하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해외 공장이 있어도 현지 품질인증과 원료 조달이 안 되면 생산량을 늘리기 어렵습니다. 시스템에 대체 노선이 등록돼 있다고 실제 선복이 확보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공급망 회복력을 볼 때 대안의 숫자보다 전환에 걸리는 시간을 확인하는 편이 더 현실적입니다. 공급업체를 바꾸는 데 며칠이 걸리는지, 항구를 바꾸면 어떤 계약을 새로 맺어야 하는지, 다른 공장에서 생산하려면 어떤 인증을 다시 받아야 하는지를 평상시에 알아둬야 합니다. 위기가 생긴 뒤 대안을 찾는 기업과 이미 실행 조건까지 확인해 둔 기업은 움직이는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주 시장은 지난주의 ‘쓸 수 있는 길’이라는 질문을 더 구체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길은 열려 있어도 보험과 결제가 안 되면 화물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공급처가 있어도 실제 물량을 받을 수 없다면 대안이 아닙니다. 공장이 있어도 해당 시장에 제품을 보낼 수 없다면 생산거점의 숫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단기적으로는 호르무즈와 흑해의 운송 차질, 관세, 해상·항공운임 같은 가격 신호가 먼저 움직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길게 보면 기업 간 차이는 다른 곳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제가 생긴 뒤 새 길을 찾는 기업과 이미 사용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준비해 둔 기업의 차이입니다.
세계 공급망에 길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항로와 공급처는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 다만 실제 거래에서는 그중 일부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선박과 보험, 결제, 통관, 원산지, 인증이 연결돼야 비로소 하나의 공급망이 움직입니다. 지금 기업이 확인해야 할 것도 결국 여기에 있습니다. 대안이 몇 개인지가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대안을 실제로 얼마나 빨리 움직일 수 있는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