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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장면 하나가 오래된 생각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최근 한 드라마에서는 한 인물이 본사에서 지방 공장으로 발령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문제는 그 묘사 방식이다. 공장으로 향하는 순간부터 이미 ‘낙후된 곳’, ‘쓸모없는 부서’, ‘구조조정 1순위’라는 편견이 짙게 깔려 있고, 시청자는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유도된다. 안전 점검은 그저 형식적인 절차로 흐릿하게 처리되고, 물류 현장에서 필수적인 고박 점검조차 설렁설렁 진행되는 장면이 이어진다. 심지어 개똥을 치우는 것이 주요 업무인 듯 묘사되며, 지방 공장은 미개하고 어딘가 뒤처진 공간으로 소비된다. 밥 시간만 되면 모두가 음식이 동나지 않을까 뛰어가는 장면은 자칫 우스꽝스럽게 보이도록 구성되어 있고, 이는 현장의 노동을 가볍게 희화화하는 느낌까지 준다.
이런 묘사는 지금 시대와 점점 더 어긋난다. 제조업과 물류업은 더 이상 낡은 공장 굴뚝 산업이 아니다. 피지컬 AI와 인공지능, 스마트 팩토리, 스마트 물류로 상징되는 고도화된 산업군으로 변모하고 있다. 자동화 설비와 데이터 기반 운영이 일상화됐고, 인력 구조도 디지털 전환 중심으로 빠르게 개편되고 있다. 기술 혁신이 산업의 속도를 결정하는 시기인데, 이 드라마는 마치 십여 년 전 상태 그대로 산업을 멈춰 세운 듯한 장면만 반복한다.
문제는 단순히 드라마적 연출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중이 접하는 서사는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산업은 첨단화되고 있는데, 콘텐츠는 여전히 ‘지방 공장은 낙후됐다’ ‘물류는 힘든 일만 한다’는 이미지를 덧칠한다. 이 간극이 커질수록 제조와 물류 분야는 잠재 인재에게 멀어지고, 산업은 필연적으로 인력난을 겪게 된다. 시청률 높은 드라마일수록 영향력은 더 강해지고, 잘못된 인식은 더 넓게 퍼진다. 그래서 이런 묘사는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표현의 현실화다. 물류와 제조 현장은 기술 변화로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자동화 설비가 확대되고 있고, 데이터 기반 모니터링과 로봇 운영이 일상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콘텐츠 속 묘사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이고, 현실을 담기보다는 오래된 인식을 반복하는 데 머문다. 이렇게 만들어진 오해는 취업을 앞둔 청년들에게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고, 결국 산업으로의 유입을 막는 또 하나의 장벽이 된다.
우리가 당연하게 소비하는 드라마 한 편이 사회 인식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특히 제조업과 물류업은 국가의 기반 산업이다. 이 산업을 시대 뒤편으로 밀어내는 연출은 더 이상 웃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산업 흐름을 반영하지 못한 후진적 묘사와 대사는 현실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산업 발전에도 기여하지 못한다. 스마트 물류와 스마트 제조가 미래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지금, 노동의 가치와 산업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성숙한 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설령 실제 현장에서 힘든 일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특정 직업군을 향해 모멸감을 주는 방식의 묘사는 결코 옳지 않다. 그들은 누군가의 부모이자 누군가의 자녀이고, 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가진 존재다. 그들의 일을 비하하고 폄훼하는 순간 사회 전반의 가치 기준은 흔들리고, 자라나는 아이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이는 단순한 드라마 한 장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통념을 재생산하는 매우 위험한 방식이다. 과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시청률이 높았던 ‘왕가네 식구들’에서는 택배기사를 향해 “지금은 택배 한다”, “험한 일 안 하게 생겼는데 안됐다”와 같은 표현이 대사로 등장하며, 택배업을 노골적으로 낮잡아 보는 장면이 그려졌다. 당시에도 많은 이들이 씁쓸함을 느꼈고, 이런 묘사가 현장 노동자들의 자존감을 꺾는 것은 물론 산업 전체 이미지에도 악영향을 준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노동은 냉정히 말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 일을 하는 이들이 자신의 일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 가치가 타인을 폄훼하며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위치를 높이기 위해 누군가의 직업을 낮게 그리는 방식, 드라마적 과장 속에 직업군을 희화화하는 방식은 이제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창작자들이 이런 후진적 발상을 반복할 때마다 사회는 뒤로 미끄러지고, 산업은 왜곡된 이미지 속에 고착된다. 드라마 작가들이 시대 흐름을 직시하고, 사회적 책임을 인식한 서사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더 이상 누군가의 삶을 가볍게 다루는 설정으로 사회에 악영향을 주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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